<호모데우스>에서 하라리는 진화론을 토대로 앞으로 다가오게될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종교, 심리학, 인공지능, 생명과학 등의 방대한 지식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어느순간부터 한 가지 전공이나 학문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어렵겠지만 될 수 있는 모든 학문을 통섭 함으로써 확립된 지식과 경험을 융합해 우리의 삶에대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시해야 할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꾸역꾸역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은 지양해야될 것이다. 지금은 다소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그나마 객관적으로 증명된 자연 및 사회과학, 인문학 그리고 역사에서의 우리 행동과 경험을 토대로 그 어떤 무엇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 호모 데우스 > 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조금이나마 ‘예측’해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이야기하며 토론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이 가벼운 편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진화론부터 시작해 다양한 학문들의 개념이 나오기 때문에 책 전체를 리뷰하기에는벅찬게 사실이다. 그 중 인공지능과 인지혁명 그리고 데이터교(敎)에 대해 관심있게 읽었기 때문에 조금 말해볼까 한다.
인공지능과 테이터가 중요해진 시대 속에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세계는 자유주의와 인본주의를 완벽한 것이라 믿어왔지만 전래없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정말 자유주의가 맞는걸까? 정말 우리가 추구하는 인본주의가 완벽한 걸까? 과학은 진리를 추구함과 동시에 사실만을 받아들이면서 자유의지를 부정하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과 의식을 연구하는 철학자들 중에서도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문제가 쉽게 결론이 나지 않겠지만, 자유로운 선택을 본질로 추구하는 자유주의에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왜 자유의지가 중요한지는 앞으로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칠 인공지능의 발달과 생명과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생각은 자유의지가 아닌 전기적인 신호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미리 알 수 있고 이것은 인공지능과 다를게 없는 ‘결정론’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지를 의심하는 것은 단지 철학적인 연습이 아니라 실질적인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유기체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면 약품, 유전공학과 뇌 시뮬레이션을 통해 우리가 그들의 욕망을 조정하고 심지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유기체를 알고리즘으로 보는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하라리는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과학적 사실은 우리가 믿고있는 자아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보면, 우리는 통합된 유일한 자아를 가지고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한 과학적 주장은 인본주의에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자유주의에 기반을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시장 그리고 민주주의와 같은 모든 것들이 사실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것들은 성급한 결론이고 이에 대해서는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상황들은 혁명처럼 급격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새롭게 ‘기술적 인본주의’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마땅한 대안이 없으며, 다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인공지능과 생명과학의 발달로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 진화하는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어렵지만 우연과 필연 모두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가 의식을 획득하고 감정과 느낌을 갖게 되지는 않을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혁명의 기로에 서있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있다.” 이 말은 인공지능이 발달함에 있어 대부분의 인간이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경고다. 신이 되려는 우리의 노력이 오히려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는 역설이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있는 기계가 등장한다면, 나 자신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기 보다는 인공지능에게 맡기는 것이 일상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에서도 인간의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의 등장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우리의 경험과 감정, 그리고 욕망으로 구축해온 이 세계의 전통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존재이유를 찾을까?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정보. '데이터교'라는 것이다. 인간은 데이터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처리에 있어서 인간보다 인공지능이 뛰어나다면 인간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것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데이터 축적에 기여할수록 더욱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데이터 자체가 목적이 되고 여기에 합류하지 못하는 인간은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된다.
IoT와 빅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의 발달은 데이터교를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마치 과거에 실재하지 않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숭배했듯, 기술적 인본주의 시대에 우리는 데이터를 숭배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직업도 그렇고 다방면에서 이렇게 될 가능성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시스템의 본질이다. 이에 대해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데이터교는 한가로운 예언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른 종교들과 같이 데이터교도 자기들만의 실천적인 계율을 가지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 데이터신봉자는 더욱더 많은 미디어들을 연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게 함으로써 데이터의 흐름을 극대화해야 한다. 다른 종교와 같이 데이터교 또한 사람들을 전도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이것의 두 번째 계율은 세상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데이터교는 모든 인간을 알고리즘화 하면서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한다. 모든 것에 연결됨으로써 인간은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경험은 오직 데이터로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데이터 처리에 있어서 인간보다 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을 숭배하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터교의 출현은 당연하다. 사실 지금도 자기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아는 인공지능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누구와 친구를 맺는지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지금 기술수준으로 보면 아직 인공지능의 단계는 초기단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인 AGI나 ASI의 단계까지 가면 무슨일이 나타날까? 이정도 수준까지 가게된다면 데이터로 인해 인간은 ‘신’이 아닌 단지 데이터에 의존하고 데이터를 숭배하는 존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책 마지막에서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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